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문단 편집) === 파리에서 === [[파일:그로센딕 젊음.gif]] 그로텐디크는 파리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앙리 카르탕의 세미나에 참석해서 앙리 카르탕, 장 델사르트, 클로드 슈발레, 로제 고드망, 장 디외도네, [[앙드레 베유]], [[로랑 슈바르츠]] 등 당대 프랑스 세계 최고의 수학자들을 만났으며[* 이전까지 수학의 중심은 독일의 괴팅겐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수학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로 옮겨왔다. 50년대 당시 프랑스 수학은 황금기를 맞이하여 세계 최고수준이었다.] 그보다 두 살 연상의 [[장피에르 세르]] 등이 속해있던 유망한 젊은 수학자 집단과 교류하며 수학 공부를 계속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류 수학자들과 한번도 섞인 적이 없었던 그로텐디크는 그 집단에서 동료 학자들의 지식의 양과 습득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한국으로 치면 이름값 낮은 지방대학 수학과에서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아 설포카급 명문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똘똘한 자대 출신 학생들에게는 한없이 못 미치는 학업능력으로 인해 자괴감에 빠지는 [[클리셰]]적 사례인데, 이런 학생들이 포기하지 않고 학업에 매진하여 어지간한 4.xx 자대생 이상으로 큰 성과를 내는 예가 종종 있다. 그로텐디크가 따라가기 힘겨워하던 월드클래스 선배 수학자들도 오늘날 한국에 비유하면 '대치동 사교육 - 과학고 조기졸업 - 설포카 - 해외명문대 유학 - 국내 명문대 교수 임용'에 준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쳤던 이들이 많았다. ], 다른 수학자들과 협력연구를 하는 데에도 걸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이는 상당부분 그로텐디크의 학업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로텐디크는 다른 수학자들이 '합의를 통해' 참이라고 간주하는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고, 그 개념들을 직접 증명하면서 나아가려 했다. 또 그는 야심이 매우 커서 쉬운 길을 가기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했고 모든 것을 무척 힘들게 노력해서 얻었다. 그는 그 시절에 대해, 동료 수학자들은 수학을 아주 손쉽게 다루는 것처럼 보인 반면 자신은 '느릿느릿 굴을 파며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꼈다고 회고했다.[* 다른 수학자들이 논리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주장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로텐디크가 어울린 수학자들이 [[니콜라 부르바키|누구누구]]였는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단지 이들이 ~~그랑제꼴부심에 쩔어가지고는~~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이고 신진 수학자들에게 불친절하기만 한 서술과 토론방식을 고집한 것, 그리고 그로텐디크는 그런 잘난 척 하는 엘리트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는 희대의 독종이었다는게 문제였다.] 이를 21세기의 대학 교육과정에 비유하면, 벡터미적분학의 간단한(?) 문제풀이 숙제에서 문제의 답은 간단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매끄럽지 않은 주장은 [[위법수집증거배제의 원칙|독수독과]]로 취급한 후 해석학과 미분기하학과 위상수학 책을 읽어가며 필요한 정리를 끄집어내어 100페이지 이상의 빌드업을 선보이고서 그 간단한 한 문제를 풀어보이는 격이다. 스스로의 역량 강화에는 당연히 도움이 되고 교수에게 공부 열심히 한다는 인상을 남기기에도 충분하지만, 당장 수업 진도를 빨리 나가야 하는 교수나 스터디그룹 동료들에겐 고구마가 따로 없는 공부법이다. 함께 공부하는 자리에서 그런 학생을 마냥 기다려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유도리 없는 공부법을 끝까지 고수한 그로텐디크가 선배와 동료들과 어울리며 겪었을 열등감은 굉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열폭에도 불구하고 그로텐디크는 다음과 같은 회고 또한 남겼다. >'''“그 집단에서 뛰어났던 사람들은 모두 유능하고 저명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30~35년이 지난 후 나는 그들이 우리 시대 수학에 정말로 심오한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그로텐디크는 로랑 슈바르츠에게 1950년부터 지도받았으며 이후 낭시 대학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게 된다. 그는 함수해석학을 공부하여 위상 벡터 공간에 있어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었다. 박사과정 당시 지도교수 슈바르츠가 그에게 내민 자신의 논문 말미에는 14개의 문제가 있었는데 슈바르츠와 디외도네조차 해결하지 못한 난제였다. 그런데 그로텐디크는 몇주만에 이 문제의 절반 가까이를 해결했고 일년이 지나기 전에 나머지 것도 해결하였다. 당시 지도교수인 슈바르츠는 그로텐디크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하루에 25시간, 26시간씩 일한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그런 몰입의 결과물이 300쪽이 넘는 학위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 대해 제출할 때 슈바르츠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대작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는 1957년부터 돌연 함수해석학을 그만두고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 방면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은 난제와 미결 문제가 넘쳐나기로 유명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자신의 수학에 대한 고찰과 사색이 담겨있는 자필 저서인 《추수와 파종(Récoltes et Semailles)》에서 그가 수학에 대한 여정을 시작하였던 해석학의 땅에서 대수기하학의 땅으로 넘어갔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던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그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 그건 마치 메마르고 거친 스텝을 지나 갑자기 풍요로운 부가 넘치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선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부는 무한대로 늘어나 아무데나 손만 뻗어도 따고 캐낼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